한자를 번역하다 그림이 됐다. 최수련의 기묘한 회화 세계

책을 읽다가 모르는 단어에 밑줄을 긋고, 여백에 뜻을 적고, 잘못 이해한 문장을 다시 고쳐 쓴다.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익숙한 풍경이다. 그런데 그 필기 자체가 하나의 그림이 될 수 있다면 어떨까?

작가 최수련은 바로 그 가능성을 탐색한다. 오래된 한문을 옮겨 적고 번역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검은 글씨, 형광색 표시, 삐뚤어진 선과 수정 흔적을 회화의 언어로 발전시킨다. 완벽한 번역문보다 그 문장을 이해하려고 애쓴 시간이 그림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2026년 10월 10일부터 12월 9일까지 서울 갤러리조선에서 열리는 개인전 《개자원 무덤 芥子園墓叢》은 이러한 작업을 소개한다. 이번 전시의 또 다른 무대인 WWNN에서는 드로잉을 중심으로 서로 다른 표현 방식을 살펴볼 수 있다.

흥미로운 건 출발점이 단순한 필기 노트가 아니라 수백 년 전 동아시아의 회화 교본과 기이한 이야기들이라는 사실이다.

잘못 쓴 글씨도 그림이 될 수 있을까?

최수련은 최근 몇 년 동안 중국 청나라 시대의 지괴소설과 동아시아 전통 화론을 읽고 필사해 왔다.

지괴소설은 귀신이나 기이한 사건, 현실에서 쉽게 설명하기 어려운 존재를 소재로 삼는 고전 서사다. 화론은 그림을 어떻게 그리고 감상할 것인지에 관한 생각과 이론을 담은 글이다.

작가는 이러한 자료를 읽으면서 한문 원문과 한국어 번역을 비교하고, 직접 뜻을 풀어 적는 작업을 이어왔다. 그 과정에서 만들어진 필기 노트가 어느 순간 완성된 회화 못지않은 조형적 가능성을 지녔다고 생각하게 됐다.

노트에는 서로 다른 성격의 표시들이 쌓인다.

한문 원문은 검은색으로 적히지만 읽는 법과 해석은 여러 색으로 덧붙여진다. 모르는 글자는 형태를 따라 그리듯 쓰기도 하고, 잘못 옮긴 문장은 지웠다가 다시 적는다. 중요한 부분에는 형광색을 칠하고, 빠뜨린 단어는 문장 사이에 끼워 넣는다.

이러한 흔적은 일반적인 공부 노트라면 정리해야 할 대상일 수 있다. 그러나 그림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된다.

검은 글씨가 반복되는 사이에 갑자기 등장하는 밝은 색, 가지런한 문장 사이로 비집고 들어온 작은 글자, 지워진 부분 위에 겹쳐진 새로운 선은 의도적으로 계획하지 않은 구성을 만들어낸다.

여기서 최수련이 주목하는 것은 단순히 손글씨가 아름답다는 사실이 아니다. 무언가를 이해하려는 과정에서 발생한 우연과 불완전함이 회화의 형태로 전환될 수 있다는 가능성이다.

글을 읽기 위한 기록이 어느 순간 바라보기 위한 이미지가 되는 셈이다.

전시 제목의 ‘개자원’은 무엇일까?

《개자원 무덤》이라는 독특한 제목을 이해하려면 먼저 《개자원화전 芥子園畫傳》을 알아야 한다.

《개자원화전》은 중국 청나라 시대에 출판된 회화 교본이다. 1679년 처음 간행됐으며, 나무와 바위, 인물과 풍경 등을 그리는 방법을 여러 그림과 설명으로 전달했다.

오늘날처럼 미술관의 소장품을 쉽게 찾아보기 어려웠던 시대에 그림을 배우는 사람들에게 이런 교본은 중요한 자료였다.

미국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소장품 설명에 따르면 《개자원화전》은 중국뿐 아니라 한국과 일본에도 널리 전해졌고, 동아시아 회화 학습에 큰 영향을 남겼다.

단순히 아름다운 옛 그림을 모은 책이 아니라, 그림을 구성하는 요소를 익히고 이전 시대의 화풍을 학습하도록 돕는 실용적인 안내서였던 것이다.

그런데 최수련은 이 책의 이름에서 예상하지 못한 이야기를 떠올린다.

그림을 배우기 위한 정원인 ‘개자원’에 작은 무덤이 숨어 있었다면 어떨까. 아름다운 산수와 그림의 원칙을 이야기하던 공간 아래에 기이하고 설명하기 어려운 무언가가 묻혀 있다면?

물론 이는 실제 개자원에 무덤이 있었다는 역사적 주장이 아니다. 작가가 만들어낸 가상의 설정이다.

그리고 바로 이 상상이 전시의 독특한 분위기를 이해하는 단서가 된다. 그림을 올바르게 그리는 법을 가르치는 오래된 교본에, 정답이 없는 괴담과 죽음의 이야기가 결합하기 때문이다.

오래된 산수화에 기묘한 이야기를 숨기다

전시에 등장하는 풍경은 《개자원화전》을 비롯한 동아시아 전통 회화의 이미지에서 출발한다.

나무, 바위, 언덕, 물결, 집처럼 익숙한 산수화의 구성 요소들이 서로 다른 지역의 표현 방식을 거쳐 작품 안으로 들어온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풍경이 특정한 이야기 하나만을 위한 무대는 아니라는 것이다.

조용한 언덕은 평범한 여행의 배경이 될 수도 있고, 오래된 괴담이 시작되는 장소처럼 읽힐 수도 있다. 나무와 바위가 놓인 풍경은 보는 사람의 기억과 상상에 따라 다른 의미를 얻는다.

최수련의 작업에서는 이런 풍경이 무덤과 기이한 이야기를 암시하는 서사와 만난다.

평온한 이미지와 어딘가 불길한 내용이 같은 화면 안에 놓이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흥미로운 대비가 생긴다. 전통 회화 교본은 무엇을 어떻게 그릴지 설명하지만, 괴담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다고 믿는 세계를 의심하게 만든다.

하나는 세상을 일정한 규칙에 따라 표현하려는 시도이고, 다른 하나는 그 규칙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사건을 이야기한다.

서로 다른 두 세계가 한 작품에서 만날 때, 익숙한 풍경도 이전과는 조금 다르게 읽힐 수 있다.

최수련은 왜 오래된 동양의 이미지를 계속 그릴까?

최수련의 작업에서 동아시아의 고전 이미지는 단순히 오래된 아름다움을 재현하기 위한 소재가 아니다.

작가는 현대에 다시 소비되는 ‘동양적인 이미지’에 관심을 가져왔다. 선녀나 전통적인 여성 인물, 오래된 설화에 등장하는 상징들은 익숙하지만, 동시에 오늘날의 시선에서는 낯설거나 진부하게 보일 수 있다.

그의 대표적인 작업인 〈선녀〉와 〈태평녀〉 시리즈 역시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옛이야기 속 여성 인물은 아름답고 온화하며 수동적인 존재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이미지는 전통문화의 일부로 사랑받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여성의 역할을 제한하는 낡은 관념을 반복하기도 한다.

최수련은 이런 이미지에 무조건적인 애정을 보내지도, 완전히 거부하지도 않는다.

그 안에는 익숙한 것에 대한 향수와 동시에 그 이미지가 지닌 한계에 대한 의심이 존재한다.

이러한 태도는 그의 고전 필사 작업과도 연결된다.

오래된 책에는 당대의 사람들이 세상을 설명하려 했던 지식과 믿음이 남아 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합리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야기나 가치관도 포함되어 있다.

작가는 그것을 단순히 틀린 지식이라며 버리기보다, 왜 그런 이야기가 만들어졌는지 살펴보고 다시 자신의 언어로 옮긴다.

과거를 공부하면서도 과거를 무조건 이상화하지 않는 태도. 그것이 최수련의 작품을 단순한 전통 이미지의 재현과 구분하는 중요한 지점이다.

2023년의 필사 작업에서 2026년의 무덤까지

이번 전시를 더 흥미롭게 만드는 것은 최수련이 이전부터 이어온 작업과의 연결이다.

2023년 갤러리조선에서 열린 개인전 《그림 회繪에 그림 화畫》에서도 작가는 오래된 문헌을 읽고 옮기는 과정을 그림에 활용했다.

당시 소개된 〈한글세대를 위한 필사〉 연작은 한문 원전을 바탕으로 독음과 한국어 해석을 함께 적는 작업이었다.

특히 동아시아 회화 기법을 설명하는 책 《The Tao of Painting》의 내용을 그림의 바탕으로 활용하기도 했다. 이 책은 《개자원화전》을 영어로 번역하고 해설한 미술사 연구서와 연결된다.

2023년의 작업이 고전 문헌과 그림의 관계를 본격적으로 탐색한 과정이었다면, 2026년 《개자원 무덤》에서는 그 문헌을 읽으며 생긴 필기의 형태뿐 아니라 작가가 상상한 이야기의 세계까지 확장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과거에는 그림을 배우기 위해 쓰인 책이 오늘날 다른 그림을 만드는 출발점이 된다.

여기에는 흥미로운 역전이 있다.

오래된 회화 교본은 올바른 표현 방식을 가르치지만, 최수련은 그것을 읽다가 생겨난 서툰 흔적과 해석의 차이까지 작품으로 가져온다.

그림을 배우는 과정에서 생기는 미완성의 기록이 또 다른 완성된 그림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페르시아 세밀화와 동아시아 산수화가 만나는 화면

《개자원 무덤》은 갤러리조선과 WWNN, 두 공간으로 나누어 전개된다.

갤러리조선에서는 페르시아 세밀화의 구성 방식을 참고한 대형 회화가 중심이다.

페르시아 세밀화는 역사적으로 서적의 삽화와 세밀한 회화 작업을 통해 발전한 시각 전통이다. 인물과 건축, 자연의 요소들을 한 화면 안에 복합적으로 배치하는 방식은 서사를 전달하는 수단으로도 사용됐다.

최수련이 이러한 구성 방식을 참고한다는 사실은 이번 전시가 단순한 동아시아 산수화의 재현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동아시아의 고전 텍스트에서 출발한 이미지가 다른 지역의 회화 전통과 만나는 것이다.

다만 실제 개별 작품에서 어떤 페르시아 세밀화의 구성 원리가 사용됐는지는 작품을 직접 관찰하고 비교해야 구체적으로 판단할 수 있다.

WWNN에서는 조금 다른 방식의 실험이 이어진다.

만화의 칸처럼 화면을 나누거나, 낙서처럼 보이는 선을 활용하고, 종이의 뒷면이나 덧붙인 종이를 표현에 사용하는 드로잉 작업이 소개된다.

두 공간을 연결하는 중요한 요소는 완성된 그림의 형식 자체보다 이미지를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한쪽에서는 여러 회화 전통이 결합된 커다란 화면을 통해 이야기를 구성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종이와 기록이라는 작은 단위에서 그림의 가능성을 탐색한다.

같은 문제의식을 서로 다른 규모와 매체에서 살펴볼 수 있다는 점이 이번 전시의 특징이다.

지우고 고쳐 쓴 흔적이 남아 있는 이유

일반적으로 무언가를 완성하려면 그 과정에서 발생한 오류나 불필요한 흔적을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글을 수정한 뒤에는 틀린 문장을 지우고, 그림을 완성한 뒤에는 밑그림을 감추기도 한다.

하지만 최수련의 작업을 이해할 때는 반대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어떤 글자를 몰랐기 때문에 남긴 표시, 처음 해석이 마음에 들지 않아 다시 쓴 문장, 중요한 내용을 잊지 않으려고 칠한 색이 그 사람이 텍스트와 관계를 맺었던 시간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수정 흔적이 그 자체로 좋은 회화가 되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건 그런 기록을 어떤 방식으로 선택하고 화면에 구성하느냐다.

최수련은 공부의 과정에서 발견한 시각적 가능성을 회화로 연결하고, 오래된 이야기에 대한 자신의 의문과 해석을 그 안에 함께 남긴다.

작품을 바라보는 관객 역시 모든 한자의 뜻을 정확히 이해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글씨의 반복이나 색의 충돌, 서로 다른 형태가 만들어내는 관계에 주목한다면 하나의 이미지로 접근할 수도 있다.

읽을 수 있는 글과 완전히 해석할 수 없는 이미지 사이에서 관객은 작품을 이해하는 여러 방법을 발견하게 된다.

최수련 《개자원 무덤》 전시 정보

최수련 개인전 《개자원 무덤 芥子園墓叢》은 2026년 10월 10일 개막해 12월 9일까지 서울 종로구 갤러리조선에서 열린다.

갤러리조선의 주소는 서울 종로구 북촌로5길 64다. 이번 전시는 WWNN에서도 별도의 드로잉 작업을 선보이는 구성으로 소개돼 있다.

갤러리조선에서는 대형 회화, WWNN에서는 드로잉을 중심으로 서로 다른 작업 방식을 살펴볼 수 있다. 다만 WWNN의 개별 운영 일정과 시간, 전시 입장료 등은 방문 전에 해당 공간의 최신 안내를 확인하는 것이 좋다.

전시를 감상할 때는 단순히 어떤 이야기가 그려졌는지뿐 아니라 어떤 기록과 표현이 작품의 일부가 됐는지 살펴보면 좋겠다.

그림이란 결국 무엇을 남기는 일일까

최수련의 작업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고전을 그대로 복원하려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래된 문헌을 읽고 번역하면서 생긴 의문, 틀린 글씨와 수정 흔적, 익숙하지만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이미지들이 새로운 그림을 만드는 재료가 된다.

완벽한 지식보다 무언가를 이해하려고 노력했던 과정에 주목하는 것이다.

《개자원 무덤》은 그런 의미에서 과거의 회화 교본을 다시 읽는 전시이자, 그림이 만들어지는 방식을 질문하는 전시로 볼 수 있다.

우리는 흔히 좋은 그림을 완성된 결과물로 판단한다. 하지만 그 그림에 도달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의문과 시행착오가 있었는지는 쉽게 알 수 없다.

최수련은 그동안 화면 뒤편에 남겨두었던 흔적을 다시 앞으로 가져온다.

그에게 오래된 책은 정답을 알려주는 교과서가 아니라, 새로운 질문을 만들어내는 출발점이 된다. 그리고 그 질문은 때로 뜻을 알 수 없는 한 글자에서, 때로 잘못 그은 작은 선 하나에서 시작된다.

출처 및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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