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을 ‘검은 생명체’로 그리는 아티스트, 펠리시아 차오

따뜻한 햇빛이 들어오는 방, 식물이 가득한 주방, 침대와 소파가 놓인 익숙한 공간. 그런데 그 안에는 어딘가 지쳐 보이는 작은 인물과 정체를 알 수 없는 검은 존재가 함께 있다.
샌프란시스코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아티스트 펠리시아 차오(Felicia Chiao)의 그림이다.
산업디자이너로 일했던 차오는 2019년부터 일주일에 한 장씩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후 일러스트레이션 작업을 본격적으로 이어가며 혼자 있는 시간, 불안, 고독처럼 쉽게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을 작은 방과 이름 없는 인물들로 풀어냈다.
그림 속 둥근 인간형 캐릭터들은 특별한 사건을 겪지 않는다. 혼자 밥을 먹고, 냉장고 앞에 앉아 있고, 침대에 누워 있거나 방 안을 서성인다.



차오는 자신의 그림을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을 탐색하는 하나의 방법으로 설명한 바 있다. 그래서 화면 속 장면은 극적이라기보다 익숙하다. 누구나 한 번쯤 지나쳤을 법한 평범한 순간 속에서 감정이 조금씩 드러난다.
검은 존재는 어디에서 왔을까

차오의 작품을 계속 보다 보면 거의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존재가 있다. 둥글고 검은, 콩처럼 생긴 생명체다.
처음부터 불안을 상징하는 캐릭터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다.
차오는 이 존재가 처음에는 불안이 심해질 때 함께 나타났던 자신의 신체적 불편함, 특히 위장을 표현하는 이미지에서 출발했다고 설명했다. 이후 작업이 이어지면서 이 검은 존재는 불안과 정신적인 상태까지 함께 보여주는 캐릭터로 확장됐다.
변화도 있었다.
초기의 그림에서는 몸속에 갇혀 있거나 인물 내부에 존재하던 검은 형체가 어느 순간 밖으로 빠져나온다. 이후에는 집 안을 함께 돌아다니고, 옆에 앉아 있거나 침대 가까이에 머무는 모습이 등장한다.
두려운 존재라기보다 반려동물처럼 늘 곁에 있는 동반자에 가까워진 것이다.


따뜻한 방 안의 불편한 감정
차오의 그림이 독특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소재와 분위기의 대비에도 있다.
화면에는 따뜻한 색이 사용되고, 식물과 컵, 과일, 시계 같은 작은 물건들이 빼곡하게 놓인다. 방 자체만 보면 편안하고 아늑하지만 그 안에 있는 인물은 종종 외롭거나 지쳐 있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가만히 머문다.
2024년 개인전 《Homebody》에서도 차오는 집에 혼자 머무는 시간이 주는 평온함과 고독을 함께 다뤘다.
집은 가장 편안한 장소이면서 동시에 혼자라는 감각이 가장 크게 느껴질 수 있는 공간이다. 차오의 그림에서는 그 두 감정이 분리되지 않은 채 같은 방 안에 존재한다.

그래서 그의 작업에서 불안은 거대한 사건처럼 등장하지 않는다.
늦은 밤 냉장고 앞에 앉아 있는 순간, 침대에서 나오지 않는 시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소파에 머무는 하루처럼 평범한 일상 바로 옆에 조용히 붙어 있다.
펠리시아 차오의 그림이 낯설면서도 이상하게 익숙하게 느껴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말로는 잘 설명되지 않던 감정을 작은 방과 이름 없는 인물, 그리고 검은 생명체 하나로 눈앞에 꺼내놓기 때문이다.
검은 존재는 괴물이 아니라 감정을 나타내는 방식
펠리시아 차오의 그림에 자주 등장하는 검고 둥근 캐릭터는 관객에 따라 작은 동물이나 그림자처럼 보인다. 그러나 작가는 이 형상이 처음부터 판타지 속 악당을 표현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고 설명했다. 자신의 몸이 불편하고 마음이 힘들었던 시기를 그림으로 기록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모양이었다. 검은 캐릭터의 크기가 매번 같지 않고 인물에게 바짝 붙거나 멀리 떨어져 있는 모습도 이런 출발점을 생각하면 다르게 보인다.
작가는 인터뷰에서 자신의 신체 경험과 정신적 상태가 이 형상에 영향을 주었다고 이야기했지만, 관객이 각 그림 속 인물을 작가 본인과 완전히 동일한 존재로 단정해서는 안 된다. 그림 속 인물은 감정을 전달하기 위한 화자의 역할을 할 수도 있고 보는 사람이 자신을 투영하는 대상으로 느낄 수도 있다. 검은 형상을 하나의 진단명이나 고정된 증상으로 해석하기보다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상태를 시각적으로 보이게 만든 장치로 읽는 편이 작품의 가능성을 넓혀준다.
같은 캐릭터가 몸 안과 몸 밖에 등장하는 이유
초기의 작업에서 검은 콩 같은 형상은 작은 인간형 캐릭터의 몸속에 갇혀 있는 듯 표현됐다. 이후 작품에서는 몸 밖으로 나와 창가나 바닥, 침대 곁에 있는 경우가 많아졌다. 차오는 2024년 인터뷰에서 시간이 흐르며 자신의 정신적 상태를 다루는 방식이 달라졌다고 설명했다. 같은 캐릭터를 반복해 그리지만 위치와 크기를 바꿔 개인적인 경험의 변화를 표현한 것이다.
검은 존재가 바깥에 있다고 해서 불안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읽을 필요는 없다. 오히려 늘 어딘가에 함께 존재하지만 삶의 모든 부분을 지배하지는 않는 존재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림 속 동반자의 의미가 단순한 위협에서 조금 더 복잡한 관계로 바뀌는 셈이다. 이 변화는 작가가 말한 경험과 연결되지만, 모든 관객이 같은 감정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정답이 있는 것은 아니다.
따뜻한 집이 반드시 평온한 공간은 아니다
차오의 실내 장면에는 식물과 과일, 작은 컵과 가구, 복잡하게 배열된 선반이 자주 등장한다. 화면에는 따뜻한 갈색과 주황색 계열이 사용되기 때문에 처음 보면 편안한 집의 모습을 떠올리기 쉽다. 하지만 그 공간 속 작은 인물은 혼자 앉아 있거나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시간을 보낸다. 공간은 밝고 채워져 있는데 인물의 감정은 꼭 그렇게 보이지 않는 대조가 그림의 중요한 특징이다.
집이라는 장소는 안전하고 익숙하다는 느낌을 줄 수 있지만 동시에 외로움이나 피로를 가장 강하게 느끼게 하는 장소가 될 수도 있다. 차오의 작업은 바로 그 양면성을 보여준다. 실내를 아름답게 꾸미는 일과 그 안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일은 언제나 일치하지 않는다. 작품을 보고 자신의 경험을 떠올리는 관객이 많은 이유도 평범한 일상 공간 안에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이 함께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아보기 때문일 수 있다.
Homebody와 다른 작품을 함께 봐야 하는 이유
2024년 개인전 〈Homebody〉는 집에 머무는 인물과 불안의 상징이 여러 장면에서 등장하는 전시였다. 그러나 작가의 모든 그림이 완전히 같은 주제나 구도를 갖는 것은 아니다. 작가는 인터뷰에서 감정에 따라 즉각적으로 만든 작업과 실내 공간을 멀리서 관찰하듯 구성한 그림의 느낌이 다르다고 설명했다. 같은 시기에 만들어졌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이미지에 같은 사건이 담겨 있다고 생각하면 작품의 다른 층위를 놓치기 쉽다.
또한 작가는 혼란스럽거나 복잡한 기분일 때 반복적인 비늘 무늬를 그리는 과정이 명상적으로 느껴진다고도 이야기했다. 감정을 표현하는 일이 꼭 인물의 표정이나 말풍선에만 의존하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촘촘히 반복되는 선과 장식, 건축물의 형태도 그림이 가진 리듬과 분위기를 형성한다. 관객은 중앙의 캐릭터만 보지 말고 주변 사물과 패턴이 어떻게 공간을 채우는지도 함께 살펴볼 수 있다.
마커에서 수채화로 바뀐 제작 방식
펠리시아 차오는 오랫동안 코픽 마커를 사용해 따뜻하고 선명한 색감의 그림을 그려 왔다. 이후 갤러리에서 오래 보존할 원화를 제작할 때는 수채화를 더 많이 사용한다고 밝혔다. 마커 잉크의 장기적인 보존성 문제가 원화의 재료 선택에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화면으로 감상할 때 비슷한 분위기로 보이는 작품이라도 실제 종이 위에 사용된 재료와 제작 방법은 시간이 지나며 달라질 수 있다.
수채화는 물의 양과 붓의 움직임에 따라 색의 번짐과 층이 달라지기 때문에 마커로 여러 번 색을 칠하는 방법과 작업 감각도 다르다. 차오는 새로운 재료를 다루는 과정에서 새로운 작업의 가능성을 발견한다고 설명했다. 작품의 주제만큼 그것을 어떤 물질로 남길 것인가를 고민한다는 점은 디지털 이미지로 널리 알려진 작가에게도 중요한 문제다. 관객이 전시장에서 원화를 본다면 종이와 색의 표면을 살펴보는 재미도 있을 것이다.
출처 및 참고자료
It’s Nice That — Felicia Chiao
https://www.itsnicethat.com/articles/felicia-chiao-illustration-project-100624
Colossal — Felicia Chiao Illustrations
https://www.thisiscolossal.com/2020/07/felicia-chiao-illustrations-mental-health/
The Rumpus — A Conversation with Felicia Chiao
https://therumpus.net/2023/02/08/this-is-all-the-time-we-get-a-conversation-with-felicia-chiao/
Juxtapoz — Staying Inside: An Interview with Felicia Chiao
https://www.juxtapoz.com/news/magazine/staying-inside-an-interview-with-felicia-chiao/
Instagram: @feliciachiao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