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프를 그려놓고 파이프가 아니라고? 르네 마그리트의 《이미지의 배반》

누가 봐도 파이프인데 파이프가 아니랍니다

르네 마그리트의 《이미지의 배반》에는 갈색 파이프 아래에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프랑스어 문장이 있다. 해답은 알려져 있다. 그림 속 파이프는 실제로 담배를 채워 쓸 수 있는 파이프가 아니다. 그런데 그 사실만으로 작품을 다 설명했다면 문장은 미술관의 설명판에만 적어도 됐을 것이다. 왜 화가는 그 말을 그림 안에 넣었을까.

글자가 놓이는 위치를 기준으로 세 자료를 비교했다. LACMA의 《이미지의 배반》, MoMA의 《커튼의 궁전 III》, 그리고 뒤샹의 《샘》을 찍은 1917년 알프레드 스티글리츠의 사진이다. 모두 사물과 이름의 관계를 생각하게 하지만 문장이 그림 아래에 있는 경우, 단어가 그림과 나란히 있는 경우, 작품을 부르는 이름인 경우는 같은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파이프 아래의 문장은 설명판과 다르다

LACMA 소장번호 78.7의 《이미지의 배반》은 1929년 캔버스에 유채 작품이다. 공식 정면 이미지에서는 파이프가 윗부분을 넓게 차지하고, 그 아래 밝은 바탕에 필기체 문장이 놓인다. 문장과 파이프 사이에 별도 설명판의 테두리나 다른 종이는 없다. 둘 다 같은 그림 표면에 속한다.

파이프는 명암을 가진 물건처럼 묘사된다. 문장은 읽기 쉬운 간격으로 이어지며 그 물건을 가리키는 ‘이것’이라는 말을 포함한다. 그래서 관객은 그림을 본 뒤 아래 설명을 읽는 익숙한 순서를 따르다가, 그 설명이 자신이 막 붙인 이름을 부정하는 상황과 만난다. LACMA가 광고의 이미지와 문구 같은 배치라고 설명하는 지점이다.

여기서 ‘그림이 가짜이므로 아무것도 믿지 말라’는 결론으로 갈 필요는 없다. 묘사된 모양이 파이프라는 사실과 실제 물건을 사용할 수 없다는 사실은 함께 성립한다. 문제는 무엇이 틀렸는가보다 ‘파이프’라는 말로 지금 어떤 대상을 가리키는가에 있다. 문장이 그림 안에서 그림을 가리킬 수 있게 배치돼 있기 때문에 질문이 생긴다.

ciel은 그림을 설명하는 대신 같은 자리를 차지한다

《커튼의 궁전 III》의 MoMA 현행 표기는 파리, 1928~1929년이다. 소장번호는 631.1967이다. 공개 도판에서는 비슷한 윤곽의 두 판이 나무 벽 앞 바닥에 세워져 있다. 왼쪽 안쪽에는 푸른 하늘의 표현이 있고, 오른쪽 밝은 면에는 프랑스어로 하늘을 뜻하는 ciel이 적혀 있다.

이 단어는 왼쪽 이미지의 아래에 붙인 캡션이 아니다. 비슷한 틀과 비슷한 높이를 가진 별도의 면을 차지한다. 왼쪽의 그림과 오른쪽의 단어가 서로를 보조하는 설명과 예시로만 묶이지 않고 나란히 놓인다. ‘하늘을 그린 것’과 ‘하늘이라는 말’이 각각 같은 종류의 자리를 부여받는 배치다.

푸른 면이 실내의 실제 하늘로 뚫린 구멍인지도 조심해서 읽어야 한다. 도판에는 두 틀의 두께와 주변 그림자, 뒤쪽 나무 벽과 바닥이 그려져 있다. 입체물처럼 보이는 두 판 자체가 다시 평면 회화 속 묘사다. 글자와 이미지만이 아니라 그 둘을 담는 틀도 표현이라는 조건 안에 있다.

두 마그리트 작품을 대조하면 단어의 역할이 갈린다. 파이프 아래의 문장은 ‘이것’이 무엇인지 되묻는다. ciel은 부정문을 만들지 않고 다른 방식의 하늘 표상과 같은 층위에 놓인다. 하나는 아래에서 위를 가리키는 관계, 다른 하나는 좌우를 오가게 하는 관계다. 둘 다 언어와 그림을 다뤘다는 공통점만으로는 이 차이를 설명하기 어렵다.

《샘》이라는 제목은 사진 속 사물에 적힌 말과 다르다

스티글리츠의 1917년 사진에는 방향을 바꿔 받침 위에 놓은 소변기가 보인다. 사물의 왼쪽 아래에는 R. Mutt와 1917이라는 표기가 있고, 한쪽에는 표찰이 달려 있다. 그러나 ‘Fountain’이라는 작품명을 그 물건의 표면에 크게 써 놓은 장면은 아니다. 《샘》이라는 이름과 사진 속 서명을 구분해야 한다.

MoMA가 이 사진을 소개하는 자료는 촬영자 스티글리츠와 뒤샹의 레디메이드를 따로 표기한다. 또한 뒤샹 연구 포털은 1917년 《The Blind Man》 2호의 ‘Fountain by R. Mutt’ 교정 페이지를 별도 자료로 식별한다. 사진에 찍힌 물건, 사진이라는 물체, 출판물의 제목과 설명은 서로 연결돼 있지만 같은 자료는 아니다.

《샘》이라는 이름은 기존 용도와 다른 대상을 연상하게 한다. 다만 파이프 아래 문장처럼 그 이름이 묘사된 표면 안에서 사물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이 비교에서 제목의 위치를 따지는 이유는 작품의 의미를 제목 하나가 다 설명한다고 가정하지 않기 위해서다. 1917년 물건과 후대 복제품의 사진도 서로 대신 사용할 수 없다.

문장을 옮긴다고 가정하면 무엇이 달라질까

여기서 작은 사고실험을 할 수 있다. 파이프 그림의 문장을 캔버스 밖 설명판으로 옮긴다면 같은 명제는 여전히 전달될 것이다. 하지만 같은 표면 안에서 이미지와 부정문이 함께 제시되는 관계는 달라진다. 이것은 작품을 실제로 수정하거나 관객 반응을 실험한 결과가 아니라 글의 위치에 관한 조건 비교다.

ciel을 왼쪽 푸른 면 아래로 옮긴다고 가정하면 좌우의 동등한 자리 대신 그림과 이름표 같은 위계가 강해질 수 있다. 반대로 《샘》의 작품명을 사진 속 물건 위에 합성한다면 원래 자료에 없던 글자를 새로 만들게 된다. 이런 가정을 원본의 사실과 섞으면 작품을 해설하는 대신 자료를 바꿔 설명하는 문제가 생긴다.

세 사례에서 글자는 모두 이름에 관여하지만 하는 일은 다르다. 파이프의 문장은 캔버스 안에서 묘사 대상을 가리킨다. ciel은 같은 틀을 가진 이미지와 짝을 이룬다. 《샘》이라는 제목은 작품과 사진, 출판 기록을 통해 물건을 다시 부른다. 글자의 뜻만 읽을 때보다 그것이 놓인 자리를 함께 볼 때 비교가 정확해진다.

《이미지의 배반》은 정답을 맞히고 끝내는 수수께끼만은 아니다. 그림 아래의 문장이 그림을 어떻게 가리키는지 살펴보면, 비슷한 문제를 다룬 다른 작품에서도 이름과 이미지의 관계를 더 세밀하게 구별할 수 있다. 파이프가 실제 파이프가 아니라는 답 다음에는, 그 말을 누가 어느 표면에서 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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